시집 이야기

중년의 환한 쓸쓸함 -곁을 주는 일 (문신 시집)

심심천천 2018. 4. 20. 18:14

중년의 환한 쓸쓸함

-곁을 주는 일 (문신 시집)

우부순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20180420_171105.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128pixel, 세로 2322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8년 04월 20일 오후 5:11

 

숭어

                                                          문신

 

여수에서 전화가 왔다

달 좀 보란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달을 올려다보는데

소리 좀 들어보란다

수화기 너머 소리 아닌 고요만이 들려왔다

숭어 그물 터는 중이란다

혼자

1.5FRP선 이물에 서 있단다

달빛은 환하지

물은 차지

배는 처박힐 듯 기울어 있지

그물 한 발을 당기면

숭어는 팔뚝보다 굵어 그물을 타고 튀지

상상해보란다

달빛에 반짝이는 숭어 비늘을 어쩌지 못해

전화했단다

그물 팽개쳐놓고 전화했단다

숭어 한 마리 뭉턱뭉턱 썰어 놓았단다

월편(月片) 같은 비늘을 닥닥 긁어내고는

시 쓰는 일이 이런 게 아니겠냔다

그럴 것이라고

나는 간신히 숨을 쉬며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차고

바람은 서늘한데

시 쓰고 싶으면 당장 내려오란다

새벽 뱃전에 꼭 앉아보란다

달빛 아래

반쯤 물에 처박혀 숭어 그물을 당기다 보면

그깟 시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란다

그물코마다 아가미를 꿰고는 혼신으로 비늘을 털어 대는

그 몸부림 같은 시 써보란다

달은 기울었지

물빛은 환하기

새벽, 여수에서 전화가 와서는

차가운 뱃전에 앉아

탈탈 털리는 숭어 비늘을 세어보란다

낱낱의 말들을 긁어

숭어 같은 시 한 편 꼭 써보란다

 

 

버스 정류장

 

                                                                    문신

 

첫차는 아직 오지 않았고

밤새 내린 눈이 부풀어 발목을 덮는다

버스정류장에는

긴 나무의자 양 끝을 꾹 눌러 앉은 남자와 여자

여자 쪽이 좀더 가벼운 탓인지

무거워 보이는 가방 하나가 더 놓여 있다

바람을 가리는 더러운 통 유리에는

신녀음악회 포스터 한쪽 귀퉁이가 발갛게 얼어

남자는 주머니에서 주먹을 꺼내 입김을 불기도 한다

몇 대의 택시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멈추었다가

철새처럼 훌쩍 떠나기도 하는 버스정류장

문득, 남자가 여자 가까운 곳으로 옮겨앉는다

버스정류장 지붕에서 한 무더기 눈이 쏟아진다

첫차는 아직 오지 않았고

눈구름이 흐릿해진 하늘에는

별빛 같은 것들이 파랗게 얼어 있다

더러운 입김으로 손을 데우던 남자는

이제 그 손으로 여자의 손을 녹인다

살과 살을 부비는 것처럼

몇 개의 눈송이들이 뒤늦게 그어 내리고

여자의 조그마한 운동화가 시리게 꼼지락거린다

뜨거운 엔진소리를 앞세운 첫차가

멀리서부터 눈을 밟아가며 자근자근 온다

호박마차처럼 노랗게 불을 켠 버스 이마에는

마천 행 노선표가 비뚜름하게 붙어 있다

면도를 안 한 버스기사의 별빛 같은 턱에 눈길을 던지며

여자와 남자가 버스에 오르면

버스는 뒷바퀴에 잔뜩 힘을 주고는 떠난다

살얼음이 깔리듯

긴 나무의자의 표면이 다시 조금씩 단단해져간다

신년음악회 포스터의 다른 귀퉁이가

더는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아프게 펄럭인다

발목까지 부푼 눈을 밟으며 늦게 도착한 새 여자와

그보다 조금 더 늦게 도착한 새 남자가

연극배우들처럼

긴 나무의자 양 끝에 또다시 앉아 있다

여자 쪽이 좀더 가벼운 탓인지

무거워 보이는 가방 하나가 더 놓여 있다

남자가 주먹을 꺼내 더러운 입김을 불어넣는 동안

여자의 조그만 운동화가 슬그머니 뒤꿈치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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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에는 사계절이 모두 겨울이다. 모두 눈이고 추위다. 봄에도 눈이 오고 꽃에도 눈이다. 중년의 계절을 건너가는 남자의 발목이 눈에 푹 잠긴다. 그래서 곁이 시렵고 곁을 그리워하고 곁을 나누고 싶어 한다. 살점을 발라내어 접시에 담기는 살벌한 풍경에서조차 저 살들이 다시 만나 좋겠다고 한다. 살들의 곁이 따뜻할 거라 한다. 

 

   중년을 지나고 있는 나의 곁들을 살펴본다. 더 이상 춥고싶지 않다고 오열하고 도리질쳐도 역시 중년을 건너는 것은 곁이 시려워지는 일이다. 생살이 찢겨 떨어진 살은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고독이다. 애초에 한 몸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떠나는대로 그대로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외로워할 수 밖에.

이 시인은 아직 덜 늙은 것 같다. 몸 안에 생기가 넘친다. 삶의 의욕이 넘친다. 다만 좀 슬프고 외로울 뿐. 젊지도 늙지도 못하는 중년이 느끼는 애매한 공간을 쓸쓸히 걸어 통과할 뿐이다. 시마저 없었다면 이 중년은 또 얼마나 초라했겠는가! 시로 환하게 밝히는 쓸쓸한 중년의 무늬를 보며 내 등도 둥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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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우부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천사는 디테일에 있다

 

그들은 한 때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생명이었을 것이다

몸둥이를 팔아 따뜻한 밥을 버는 노동자였으리라

웃어주고 섬겨주며 감정을 팔았고

끝내는 그들의 배알까지 파먹혀 버렸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차츰 부서져 내렸고 미세해져 갔으리라

 

미세해지고 나니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어졌으리라

온 하늘을 덮고 땅을 덮도록 거대해 졌으며

작은 숨결에도 파도처럼 일어날 수 있게 되었으리라

 

그들이 일어나는 날에

아직 생명인 것들은

조여 오는 숨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스스로 죄수가 되어 긴 반성문을 써내려가며

쪼개지고 작아지며

또 다시 미세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