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마이크로코스모스
그들이 처음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 기운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까지도 삶은 충분히 분주하고, 흥미진진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알맞은 규모와 형태 안에서.
그렇기에 작은 크기의 생명체들도 창조된 것이다,
갖가지 벌레들, 곤충들,
최소한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미물들이.
그런데 여기 갑자기, 유리 렌즈 밑에서
허풍스러우리만치 낯설고,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미약해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을 가리켜
백번 양보해도 ’작은 점‘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유리렌즈조차 건드리지 못한다.
그 밑에서 아무런 제약도 없이 두 배, 세 배로 늘어난다.
닥치는 대로, 완전히 자유롭게.
너무 많다고 말하는 건, 충분한 표현이 아니다.
현미경의 성능이 강력할수록,
더욱 정확하게, 극성스럽게 증식된다.
필요한 내장기관도 갖고 있지 않다.
성별이 무엇인지, 어린 시절과 노년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들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건 그들이다.
일부는 일시적 정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에게 일시적이란 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 알 순 없지만,
너무도 작고 미약한 나머지
어쩌면 그들에게 지속이란
적절히 분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에 실려 온 먼지 조각은 그들 앞에선
깊은 우주 공간에서 날아 온 별똥별,
손가락의 지문은 광활한 미로,
그곳에서 그들은 집결한다,
자신들만의 무언의 퍼레이드와
눈 먼 일리아드, 그리고 우파니샤드를 위해.
꽤 오래 전부터 그들에 관해 쓰고 싶었지만,
워낙 복잡한 주제라
계속 훗날로 미뤄왔다.
어쩌면 나보다 더 뛰어나고,
세상에 관해 더 많이 경탄할 줄 아는 시인에게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절박하다. 그래서 쓴다.
베르메르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에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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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는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길다. 엄청난 수다쟁이 아줌마 같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어마어마하다. 기본이 인간의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시공이고 우주며 영원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얼마나 스케일 큰지 고성능 현미경으로밖에 볼 수 없는 생명체들이 벌이는 축제에서 함께 춤추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주공간을 손바닥위에 놓고 굴리기도 한다. 도대체 어떤 눈을 가졌을까 이 아줌마는?
뿐만 아니라 시가 엄청 웃긴다. 유머가 흘러넘친다. 이렇게 엄청난 주제를 얼마나 가뿐하게 웃어넘기는지 읽는 내내 따라가기에 숨이 차다.
그래서 이 시인의 시를 노트에 쓰기 시작했다. 눈 만으로는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는 언어를 손으로 읽었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여전히 숨이 차다. 덤으로 손가락 마디마디 시어가 달라붙어 욱신거린다. 역시 시어는 그 시인의 고유한 언어라는 생각을 절실히 한다. 나와 경험이 많이 달라 시인의 언어가 무척이나 생소하고 이야기 하는 방식도 많이 낯설어 주춤거리게 된다.
하지만 마치 득도한 사람처럼 주저함 없이 발언하는 가운데 정갈한 리듬이 있고 따뜻한 슬픔이 전해진다. 진정한 도인을 만난 것 같다. 아직 시인의 시를 읽고 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아름다움을 눈 앞에 두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내가 엄청 한심스럽지만 – 이 시인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만약
우부순
만약
과거 어는 순간으로 돌아가
잘못 된 선택을 고칠 수 있다면
그래서 고친다면
지금의 나는 행복할까?
선택의 권리를 빼앗긴 미련은?
좌절된 욕망의 그림자는 쌓이는 시간으로
오히려 단단히 다져지다가
어떻게든지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려 하겠지!
금지나 억압은 폭발력을 늘릴 뿐 아니라
심하게 왜곡되어 가기도 하겠지!
…
역시
후회는
부질없군!
지나간 잘못도 최선이었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던 거지
현재가 손에 만져지는
이 느낌이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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