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이야기

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심심천천 2017. 6. 9. 14:01

         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나 여기 있으면

                                       최승자


나 여기 있으면
어느 그림자가
거기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겠지

내가 여기서
책을 읽고 있으면
까부러져 잠들어야만 하는
어느 그림자가
내 대신 술을 미시고 있겠지
한 열흘 마시고 있겠지


당분간

                                           최승자


당분간 강물은 여전히 깊이깊이 흐를 것이다
당분간 푸른 들판은 여전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은 각자 각자 잘 살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해도 달도 날마다 뜨고 질 것이다
하늘은 하늘은
이라고 묻는 내 생애도
당분간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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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은 시가 지팡이 같다. 삶을 지탱해주는 지팡이. 휘청거리는 노인 같은 승자씨는 어떻게 어떻게 시를 동무삼아 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 듯 느껴진다. 힘들고 슬프고 외로워서 삶에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이 사람을 만난다면 아무 말 없이 그저 한참을 바라만 보다 눈 들어 하늘 보다 구름보다 인사도 없이 돌아서 올 것 같다. 말도 미소도 손짓도 필요 없는 사람일 것 같다. 그러나 돌아오는 내내 가슴에 가득 일렁이는 슬픔을 다독이느라 자꾸만 깊은 숨을 쉬게 될 것 같다.
 
  감히 아름답다고 멋지다고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냥 침묵할 뿐.
 
  자꾸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온다. 갈비뼈까지 우르르 사무치는 이 느낌은 슬픔이라고 해야하나 아픔이라고 해야하나 외로움이라고 해야하나 허무라고 해야하나.

  슬픔이 필요한 시간
  시를 베낀다

  슬픔이 가슴언저리부터 번진다
  처음엔 달콤하기도 하고
  쌉싸름 하기도 하고
  아련하게 흐뭇하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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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눈 오던 날

                           우부순

흰 눈 오던 날
바다로 뛰어 갔네
한 없는 바다 위를
한 없이 덮고 있을
눈을 보러

눈발이 뛰어들던 말던
바다는 무심히 찰랑이고

스러지는 눈발 같은 내 삶의
虛를 보았네